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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꼭 가봐야할 곳> 조선의 왕궁 창경궁 : 장희빈과 사도세자

by *Blue Note*

 <서울의 궁궐> 일제의 만행이 아직도 남아있는 창경궁 구석구석 돌아보기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왕궁이 5개 있다. 그중에서 오늘 포스팅하는 창경궁은 일제 강점기에 가장 수난을 많이 겪은 궁궐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임금이 살던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고, 온갖 동물들을 들여와 동물원으로 만든 만행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케이블카, 회전목마같은 놀이시설을 설치해서 조선왕실의 본산을 위락시설화 해버리는 파렴치하고 야비한 짓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궁궐의 아름다운 수목을 뽑아버리고 일본의 상징인 사꾸라 (벚나무)을 마구잡이로 심으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짓밟았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나서도 창경원은 창경궁으로 바로 복원되지 못하고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오욕의 이름을 벗게된다. 나 역시 사쿠라 수천 그루가 심어져 있던 팔십년대초 '창경원 밤 벚꽃놀이'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갔었던 창경원 동물원, 오리모양의 배, 케이블카도... 당시 정말 즐거운 추억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한 아픔이 있었기에, 창경궁이 본래의 이름과 위엄을 회복한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 창경궁을 비롯한 서울의 5대 궁궐은 '서울 가볼만한 곳'이 아니라 '서울,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

 

 창경궁

왼쪽으로 정문인 홍화문이 보인다.

창경궁은 성종때 지어진 조선의 궁궐이다.

 

옥천교

조선 왕궁들은 모두 이런 석교를 지나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꽃나무는 벚꽃이 아닌 매화다.

벚꽃과 매화를 구별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매화는 벚꽃과 달리 꽃자루가 없어서

가지위에 바로 붙어서 꽃이 핀다.

또다른 차이점은

매화는 향기가 좋고 벚꽃보다 더 일찍 핀다는 것.

 

옥천교 위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명정전으로 가는 명정문이 보인다.

 

 

 명정문을 등지고 바라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명정문을 통과한 후 뒤돌아 찍은 모습

좌우로 품계석들이 보인다.

사진에는 안나오지만,

내 등뒤로는 명정전이 있다.

 

 

 

명정전

다른 궁궐과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

자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지형을 살린 상태에서 건물을 올린

조선의 건축정신과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광해군때 재건하였다.

 

 창경궁 명정전의 문살무늬 (창살무늬)는 특히 아름답다.

우아하고 세련된 문양이다.

 

 

명정전에 있는 드므

화재를 대비해 방화수를 담아두었던 곳이다.

 

 

 

 

명정전 바로 옆에 있는 문정전

임금이 어전회의를 하던 편전이다.

 

 

 

담장 밖에서 본 문정전

 

문정전에서 바라본 마당, 혹은 뜰

이곳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왼쪽에 일부 보이는 건물이 문정전

우측이 숭문당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쓴 어필이라고 한다.

 

 

 

 

 

 

 빈양문에서 바라본 풍경

빈양문은 명전전의 뒷쪽, 숭문당의 북쪽과 연접해 있다.

이 문을 통해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빈양문을 지나 내전으로 들어왔다.

완연한 봄이다.

 

 

함인정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구조이다.

 

경춘전

정조대왕과 헌종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환경전

임금이 늘 거동하였던 곳으로

중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통명전과 후원

통명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임금 자체가 용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이곳은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의 후원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이고 아름다운지

통명전의 뒷 마루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양화당

통명전 동쪽에 있다.

내전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한 접대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영춘헌과 집복헌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후궁들의 처소였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거처로 추정되는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양화당을 지나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오면

창경궁의 내전을 조망할 수 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환경전이다.

 

 

바람의 세기와 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 풍기대와

입체 해시계인 앙부일구

 

성종태실 및 태실비

어쩌다 창경궁에 옮겨졌는지는 확실히 모른다고...

일제가 조선왕조의 태실을 몇몇 곳에 모은 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했는데,

당시 많은 태실들이 망실되었다고 한다.

누군가 성종의 태실을 여기에 옮겨 놓았는데,

어쨌든 태실이나 태실비가 궁궐안에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라 한다.

 

 

 

성종 태실을 보고 언덕길을 따라 슬슬 내려가면

춘당지가 보인다.

원래 이곳은 조선의 임금이 농사 짓던 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연못으로 만들었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람선과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팔각칠층 석탑

설명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탑이라고 되어있다.

유교의 나라 조선의 궁궐에 불교 유물, 그것도 중국의 탑이라니...

 

대온실, 혹은 식물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1909년 세워졌다.

 

춘당지 주변의 백송

 

창경궁 궁궐내에 있는 이름도 유래도 불분명한 석탑

 

 

관천대

천문 관측을 위해

숙종때 만들었다고 한다.

 

 

 

관람을 마치고 다시 옥천교가 있는 홍화문으로 왔다.

흐드러진 매화가 찬란하다.

 

창경궁 안내도

 

이번 포스팅은 사진이 참 많다. 그만큼 울림이 컸다. 매화가 흐드러진 창경궁을 둘러볼 수 있어서 행운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오늘 창경궁 둘러보기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빈양문이었다. 외전과 내전을 가르는 빈양문을 통해 바라본 창경궁의 봄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았다. 예전에는 궁궐의 건물들이 담으로 둘러쳐져서 각각의 독립성을 유지하였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담벼락마저 없애버린 후 아직 복원이 안된 상태라 경춘전, 환경전등의 전각들이 뻘쭘하게 몸체만 덩그러니 나앉아 있어 안타까웠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성종 태실, 곳곳에 있는 불탑등도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옮길 것은 옮기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온갖 역경을 이겨낸 우리 민족처럼, 이렇게 창경궁이 우리 옆에 남아 있어줘서 고마운 마음뿐이다. 우리의 문화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가장 좋은 방법중 하나는 관심을 가지고 자꾸 가서 보고 즐기는 것이리라.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창경궁을 관람하라는 것이다. 그냥 자기 혼자 둘러보는 것과 설명을 듣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해설 시간은 창경궁 홈페이지http://cgg.cha.go.k 에서 확인하시라. 출발장소는 옥천교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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