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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여주 가볼만한 곳 > 세종대왕의 영릉 :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by *Blue Note*

<여주 여행> 영릉 (세종대왕릉) : 최고의 명당

 

조선 왕릉은 세계문화 유산이다. 의외로 이런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 외국의 박물관, 유적지는 줄줄 꿰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는 무식한 블랙 코미디가 이제는 일상화되었다. 예전에 '우리는 문화민족'이라는 구호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 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더이상 그런 말이 사실도 아닌 지경이 된 것이다. 글이 삼천포로 빠졌다. 각설하고, 여주의 영릉 (英陵)은 세종대왕의 능이다. 지척에 영릉(寧陵)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효종대왕의 능이 있으나 한자가 다르다. 조선의 왕릉은 40여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세종대왕의 능은 가장 정비와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 수도 왕릉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기에 그에 맞는 예우와 존경을 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릉은 훈민문으로 통해 들어간다.

 

입장해서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연못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방지원도 (네모난 연못, 동그란 섬)에서 원도가 없다.

원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미심쩍다.

연못과 주변의 나무들은 매우 아름답다.

 

쭉 따라 걸어들어간다.

정자각, 능침은 물론,

아직 홍살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홍살문과 멀리 정자각이 보인다.

 

가운데 사진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중앙에 정자각, 왼쪽에 수랏간, 오른쪽이 비각이다.

 

비각내 비석

왕과 왕비의 약력, 이장한 내역등 외에도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

즉 왕비가 왕의 왼쪽에 묻혔다는 기록도 있다.

 

수복방

제기를 관리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지내던 곳이다.

수수하고 단아하고...

아무튼 한옥은 아름답다.

 

정자각에서 올려다본

영릉

 

영릉은 능침으로 오르는 길을 개방해서

가까이서 능을 볼 수 있게 했다.

이 사진은 중간쯤 오른 위치에서 촬영한 것이다.

왼쪽에 비각, 중앙에 정자각

오른편에 능침으로 이어지는 언덕이 일부 보인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혼유석(상석)이 두개,

즉 합장묘라는 의미이다.

와서보니 광릉처럼 난간석만 있고 병풍석은 없다.

원래 세종의 능은 태종의 능인 헌릉이 있는

대모산에 있다가 옮겨온 것이다.

 

문인석과 무인석

아주 가까이서, 이리저리 돌아가며 볼 수 있다.

 

능침에서 바라보는 조망

영릉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다.

문외한인 나도 왠지 푸근함을 느꼈던 풍광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쓰신

최순우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맛이 시원하다.

 

능침을 보고나서 

서쪽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동입서출)

건너편으로 비각이 보인다.

 

수라간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곳

 

저 홍살문을 나가면

성스러운 왕릉에서 속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선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그래도 세종대왕의 왕릉이 잘 정비되고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이 좀 더 가까이서 왕릉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개방하고자 했던 배려심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난번 세조의 능인 광릉에서 느꼈던 무신경하고 고압적인 행정행태로 인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고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문화재나 유적을 보존하고 지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후손들이 잊지않고 마음속에 기리도록 하는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언제 어디서든 조상의 숨결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개방하고 홍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왕릉의 능침, 장명등, 혼유석, 무인석과 무인석등 여러 석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영릉 관리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옥의 티라고 할까,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정비가 너무 잘 되어있어서인지 조선 왕조의 분위기 보다는 조금 현대적인 느낌이 군데군데 묻어난다는 것이다. 가령 훈민문에서 홍살문, 그리고 다시 정자각까지 이르는 신도가 크고 널찍한 건 좋으나, 조선의 고아하고 수더분한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깔아놓은 박석들도 너무 매끈매끈하고 규칙적이어서, 그런 점도 다소 아쉬웠다. 종묘와 비교하면 이 말이 더욱 이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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