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시 & 문화재

<세조 어진> 왕의 얼굴 : 국립고궁 박물관 세조 특별전

by *Blue Note*

<세조 어진 초본> 임금의 얼굴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다. 하지만 그뿐 만이 아니다. 승정원 일기, 일성록등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록에 충실하다 못해 얼마나 강박적이었나를 웅변하고 있다. 문자를 이용해 기록하는 것 이외에, 조선의 도화서 화원들은 모든 왕실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소위 말하는 의궤도 그런 그림 중 하나다. 화원들은 또 임금의 얼굴, 용안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것이 어진이다. 조선의 모든 국왕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터럭 하나까지 똑같이 그렸다.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으니 (고종, 순종을 제외하고) 제왕의 모습은 직접 알현하지 않는 이상 어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진은 단순히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왕의 영혼이 깃든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어진을 모신 건물을 따로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진전이다 (몇해전에 어진과 진전에 대한 특별전을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열었던 기억이 있다). 너무나 아쉬운 것은 이렇게 소중하게 보관되었던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진이 한국전쟁 당시 몽땅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부산 피난 시절 급히 수습한 어진들을 용두동의 국악원 창고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그만 화마에 거의 모두를 잃고 말았다. 조선의 임금중에 얼굴 모습을 알 수 있는 분은 태조 이성계, 영조, 철종, 고종, 순종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 망실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세종대왕, 태종, 성종은 물론이고 국민들이 싫어하는 선조, 인조 임금의 실제 모습을 이제는 알 길이 없다.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잡고 등극한 세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세조의 어진을 모사한 초본이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이 2016년 전해진다. 고미술 경매장에 나온 이 초본을 국립고궁 박물관에서 구입하여 이번에 공개하게 된 것이다. 이와함께 세조와 관련된 유물들도 함께 모아서 세조 특별전을 열게 되었다. 왕의 용안을 직접 알현하는 듯한 설레임으로 이 전시회를 다녀왔다.

세조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태지석에는 출생일(1417년), 이름

태를 묻은 날짜(1438년)가 기록되어 잇다.

 

선원록

일종의 왕실 족보로

세조가 세종의 둘째아들로

1417년 출생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열성어필

역대왕의 글씨를 탁본하여 모아논 책이다.

펼쳐진 부분이 세조의 글씨

 

열성어제

왕들의 글 모음집이다.

세조가 신숙주에게 내린 표주박 술잔 시

 

경국대전

완성은 성종이 했으나

시작한 것은 세조다.

 

세조의 어진 초본이 보인다.

 

이당 김은호가

세조 어진을 모사하고 있는 모습

193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세조의 얼굴이다

동그스름한 얼굴 선..

수염이 거의 없다.

 

초본 오른쪽 아래에

낙관이 하나 찍혀있는데

이당 김은호의 낙관이다.

사실 임금어진에 감히

화원의 낙관을 찍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어진을 모신 진전을 재현해 본 모습

완성체로서의 어진은 아니지만

제기(제사용 기물)를 갖춘 모습이다.

 

경기도 광릉에 있는

세조의 왕릉

 

제사용 술잔

잔의 바닥에 광(光)이 새겨져 있어

광릉 제향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광를 참배후 영조의 글을 새긴 현판

재실 북쪽 벽에 걸었다.

참고로 영조는 글씨를 잘 썼던 조선 임금중 하나다.

1755년

 

광를 참배후 정조의 글을 새긴 현판

1792년

 

세조와 정희 왕후의 능인

광릉에 대한 영상자료들

한번 가볼만 하다

하지만 아예 못올라가게 출입을 제한해서

밑에서만 올려다보는 왕릉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수양대군이었던 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사실 단종의 능인 장릉을 가보면 삼촌에게 죽임을 당한 소년 군왕의 그 슬픔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후 후대 조선 군왕들의 행적을 보면 그러한 평가보다는 오히려 '나라를 다시 세우고 바로잡은 군주'로서 대접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진 초안으로 본 세조의 모습은 영화 <관상>에 나오는 이정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둥글고 다소 통통한 얼굴, 다소 음전한 모습이어서 처음에는 적잖이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 본질에서 벗어나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세조를 역성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건 사학자들이 할일... 다만 세조는 차가운 인상에 얼굴도 냉혹할 것이라는 대책없는 선입견은 이제 그만하자는 말이다. 아직도 그러한 편견과 이미지 조작은 대한민국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성업중이니까). 내 느낌으로는 용안에서 다소 쓸쓸함도 묻어나는 듯 했다. 세조가 신숙주에게 술을 내리며 지은 시를 보면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섬세한 모습도 엿보인다. <경이 나를 비웃었으나 / 표주박 이미 열렸으니 / 쪼개어 잔을 만들어 / 지극한 정을 보이노라>.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문헌들을 보건대, 신하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인재를 중히 쓰는데에 힘썼다는 평은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능을 쓸때도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능에는 병풍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석실로 무덤을 만들지 않고 관을 구덩이에 내려놓고 그 틈을 석회로 메움으로써 부역 인원과 조성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이후 이런 방식은 조선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다. 수백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 비록 완성된 어진은 아니어도 초본이나마 세조를 직접 알현하듯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