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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 문화재

<가야본성>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 고령 대가야 왕의 무덤

by *Blue Note*

가야본성 : 고령 대가야의 순장묘

 

 

이 전시회 바로 전에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대고려 전에 비하면 가야본성은 규모나 유물의 수준에서 확실히 떨어지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 저런 구설에 올라 전시초기부터 어려움과 해프닝도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가야라는 고대 국가를 재평가하고 그 역사와 문화를 두루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된 것도 사실이다. 흔히 대가야로 알려져 있는 가라국의 순장묘를 재현해 놓은 전시실은 인상적이었다. 가야 역사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고령 지산동 44호분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

 

으뜸방이라고 이름붙힌 왕의 무덤이다.

고령 지산동 44호, 5세기

방의 길이는 9.4m, 너비는 1.75m 이다.

 

왕의 무덤에 있던 투구

고령 지산동, 5C 가라국

 

토제등잔 & 청동그릇

왕의 무덤(으뜸방), 고령 지산동

5C 가라국

 

구슬 & 숫돌

왕의 무덤(으뜸방), 고령 지산동

5C 가라국

 

큰 칼, 왕의 무덤(으뜸방)

고령 지산동, 5C 가라국

 

왕의 방 가까이 있는 순장곽의 부장품들

제사토기, 큰칼, 금귀걸이, 손칼, 쇠화살촉

왕을 호위하던 무사의 방이다.

굽다리 접시에는 닭고기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고령 지산동 44호묘 11호 순장곽, 5세기

길이 1.8m, 너비 0.41m

 

 제사토기, 귀걸이, 가락바퀴, 철침, 손칼

6호방에는 귀걸이를 한 건장한 젊은 남자 둘이 순장되었다.

한사람은 금귀걸이 다른 사람은 금동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금 귀걸이를 한 남자의 머리 쪽에 실을 잣는 가락바퀴가 놓여 있어서

왕의 옷을 짓던 신하나 시종으로 추정한다.

고령 지산동 6호 & 32호 순장곽, 5세기

방 길이 3.78m 너비 0.48m / 길이 2.1m 너비 0.4m

 

 '대왕'을 새긴 긴목 항아리

가라국의 지배자를 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가라국

 

 금관, 6C 가라국

가야 금관은 6세기에 들어서면

관테에 풀과 꽃 모양의 세움장식이 나타난다.

국보 제 138호

 

 금제장식, 6C 가라국

국보 제 138호

 

 금동관, 보물 제 2018호

5-6C 고령 지산동 32호

 

금동관, 금제장식, 금귀걸이, 목걸이, 고리자루 큰 칼

 

금동관, 5-6C, 금제장식 6C

 

고리자루 큰 칼

가라국의 칼은 백제와 달리 용이나 봉황같은 장식을

따로 제작하여 손잡이에 끼웠다.

5-6세기, 가라국

 

목걸이, 5-6C

고령 지산동 73호, 45호

 

금귀걸이

가라국의 금귀걸이는 일본 전역의 고분에서 출토된다.

섬진강에서 남해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왜와 정치,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가라국

 

순장은 죽은 실력자를 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는 행위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이러한 풍습은 당시의 눈높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만 그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헌에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순장을 결정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은 가라국 왕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수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주산의 언덕에 있는 44호 무덤은 언덕 중앙 우뚝 솟은 곳에 있다고 한다. 직경 27m 높이 6m의 크기에 사방에 32기의 순장방이 있다. 순장자는 호위무사, 마부, 옷감 관리인등 왕을 모시는 신하들과 그의 가족으로 보인다고... 말하자면 왕을 보필하는 전문 집단이 있었다는 얘기다. 순장자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예라고 한다. 박물관측에서는 이 무덤을 실제 크기에 가깝게 재현하였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마치 무덤 한 가운데에 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이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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