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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 문화재

<여주 가볼만한 곳> 여주 고달사지 답사기

by *Blue Note*

<여주 고달사지> 고달사지 승탑, 원종대사탑과 탑비

 

여주지역은 고향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연고가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사과 과수원을 하셨던 곳이 여주 걸은리였다. 아늑하고 야트마한 구릉과 산들 바람, 그리고 봄이면 사과꽃들 천지였던 그 곳의 풍경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다. 우리 강산 어딘들 정답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은 여주는 특히 그런 곳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기 전까지 나는 여주에 고달사 터가 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곳에 고려 불교의 영광을 보여주는 승탑과 탑비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도 몇년 동안은 소위 말하는 답사를 가지 못했었다. 이번 이른 봄에 마침내 시간을 내서 다녀오게 되었다.

고달사지 입구

수령 4백여년의 느티나무가 늠름하다.

 

고달사지

사진에 보이는 곳은 설법공간인 법당지,

좌선하던 승당지와 거주공간인 요사체가 있던 자리다.

 

잘 생긴 석조다

물을 담아두거나 곡식을 씻을 때 사용했다.

바닥 오른쪽 중앙에 배수 구멍이 있다.

 

고달사지

아래사진을 기준으로

왼쪽에 석조, 중앙에는 대좌

그리고 오른쪽에 원종대사 탑비가 보인다.

 

석조대좌

불상이나 보살상이 놓여있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좌이다.

상하 지대석에 새겨진

연꽃이 위 아래 (앙련, 복련) 방향이다

10세기 후반, 보물 제 8호

 

원종대사 탑비

거북의 머리가 용머리를 닮고 힘이 넘친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의 특징이라고 한다.

직사각형의 머리돌(이수)은

구름과 용무늬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 6호

 

원종대사 탑비까지 보고

사진 중앙에 보이는 목책을 따라

사진 찍은 위치까지 오면

고달사지 승탑으로 가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작은 산길을 조금 오르면

탐방로가 끝나는 곳에

높이 4.3미터의

달사지 승탑이 보인다.

고려전기, 국보 제 4호

 

몸돌에는 문짝모양과 자물쇠 부조,

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중대석에 거북 한쌍과

좌우로 네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원종대사 승탑이 나온다.

 

원종대사탑

보물 제 7호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참 의젓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받침돌의 거북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두고 있어

비대칭의 구성이다.

그 때문에 더 역동적인 느낌이다.

 

지금은 폐사되어 남아 있는 것은 승탑과 탑비, 석조 대좌뿐이지만, 이들 석조물의 규모나 예술성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려시대의 고달사는 정말 대단한 사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볕 좋은 이른 봄에 찾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고달사는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황량함보다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미지였다. 법당이 있던 절터에서 대좌와 탑비를 둘러보고 아담한 탐방로를 따라 언덕위에서 고달사지 승탑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시 오솔길을 내려와 원종대사탑을 보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국보인 고달사지 승탑보다 오히려 원종대사탑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이유...? 구차하게 몇가지 이유를 댈 수는 있겠으나, 어떻게 설명해도 정답은 아닐 듯 하다. 그저 마음이 더 그리로 갔다, ㅋㅋ.

법당지 앞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야외 전시장에 가면 전국에서 온 승탑, 불탑등과 함께 도열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고달사지에 있는 원종대사 탑비의 경우도 비신은 복제한 것으로 원래의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사람으로 치면 이산가족인 셈이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특히 탑이나 비석은 원래의 자리에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유물도 자기 고향집에 있을 때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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