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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들

<이런저런 생각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by *Blue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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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족히 이십년은 되었지 싶다.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시인과 촌장'이라는 걸출한 남성 듀엣이 있었는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노랫말과 아름다운 선율은 당시 대중가요의 틀을 뛰어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그들의 음반에는 좋은 노래들이 참 많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그나마 기억하는 것은 '가시나무 새'일 것이다. 혹 기억하시는지... 노랫말의 첫 구절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내가 생각하는 나 vs 남이 생각하는 나.
전자를 심리학적 용어로 자아개념이라고 하는데 이 자아개념은 '남이 생각하는 나'와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아니 대개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가 생각하는 나'는 대부분 '남이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모두들 알고 있듯이 두가지 다 '나'의 특징과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비교적 근접한 답이 될 수 있겠지.


아, 이왕 골치아픈 이야기 꺼낸 김에 좀 더 들어가보자. 그럼,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를 더하기 하면 그것으로 '나'라는 인간을 충분하고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한가지가 더 추가되어야 할 듯...  그건 바로 '나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이다 (짜증나는 사람들은 여기서 글 읽기를 마치기를 권한다. 더 들어가도 비슷비슷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들이니까, ㅋ) '남이 생각하는 나'는 남들이 나에게 이야기해주기 전에는 내가 모르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판단하는'건 내 주관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둘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 이 골치아프게 설명한 세가지를 모두 합하면 그것이 '나'라는 한마리 호모 사이엔스의 정신적 속성을 충분히 설명하는 기준이 될 것인가...?
(답은 거꾸로 읽어보시게. 요니아은답)

아침에 밥 잘 먹고 나와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어줍잖은 구라를 푸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영화는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통찰력을 제시해준다. 영화속에는 전직 영화 감독이 등장하는데, 그는 영화에 대해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그의 영화로부터 그럴듯한 어떤 하나의 메시지 (그것이 도덕적인 것이든, 삶의 허무를 압축한 말이든, 아니면 또 어떤 것이든지간에)를 기어이 뽑아내고 싶어하는 관객 (혹은 메니아 팬)들의 집요한 갈망을 어눌하고 찌질한 어투로, 그러나 단호하게 잘라내 버린다. 그렇다고 이 감독이 무슨 대단하고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예술 영화의 구도자도 아니고, 그는 그저 기회만 있으면 여자들과 자고 싶어 뻔한 수작을 부리는 그렇고 그런 찌질남이다.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게 가능하다 해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현재 진행형'으로 변하고 있다. 몇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분명 아니고 지금 역시 몇년 후의 나는 아닐 것이므로..  상황이 이러할진대 남에 대해 안다고 평가하고 점수매기고 개입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가소로운 일일 것인가? 변하지 않는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자. 더 좋게 변해가는 사랑, 우정을 말하고 그것을 위해 서로 배려하는 것이 훨씬 덜 거짓스러운 태도일 듯 하다.

내 속에서 '가시 나무'처럼 서로 모순되게 부딪치며 나를 불완전하게 이루고 한편으로 변해가는, 불편하고 아름답고 탐욕스럽고 사랑스러운 여러가지 '어떤 것'들이 그저 그 곳에 있을 때, 그걸 부정하거나 숨기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비틀즈의 노래처럼 Let it be 할 때, 불완전하나마 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것이다.

어머니의 밥상을 재료 분석하고 용량표시해서 조리온도 따질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세월이 그대 얼굴에 잠처럼 내려, 그 아름다운 눈빛 찾을 수 없네'라는 노랫말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 우리 사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2011.10. 동창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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