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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라도

<전북 익산 가볼만한 곳> 미륵사지 석탑 : 동탑과 서탑

by *Blue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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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여행> 미륵사지 석탑

 

전라북도 익산은 백제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백제 무왕은 당시 수도였던 사비 (부여)에서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익산으로 실제로 천도를 단행했느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은 역사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산 천도(계획)를 추측해볼 수 있는 강력한 물증들이 있는데 바로 왕궁리 유적과 쌍릉, 그리고 미륵사지다. 미륵사지는 말 그대로 미륵사가 있었던 터다. 까마득한 옛날 어느 시점에 절은 없어지고 절터에 탑과 건물의 주춧돌, 석등의 일부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미륵사의 석탑은 동탑과 서탑 두개가 있다. 하나는 복원이라고 이름 붙힐 수 없을 만큼 날림으로 대충해서 뚝딱 세워놓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십여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모든 기술과 열정을 집약시켜 재현한 백제의 탑이다. 각각 미륵사지 동탑과 서탑이다.

미륵사지 주차장 옆에

바로 국립 익산 박물관이 있다.

 

용화산을 배경으로 조망한

미륵사지 석탑

왼쪽이 석탑, 오른쪽이 동탑이다.

 

미륵사지 동탑

동원 9층 석탑이라고도 한다.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년만에 끝냈다.

에산이 부족하여

기계로 깍아낸 돌들을 쌓아올렸다.

 

 

미륵사지 서탑

국보 제 11호

 

여러 방향에서 찍은 서탑의 모습

보수는 6층까지 시행하였다.

추론에 의한 복원을 지양한 결과다.

 

금당지

금당 (본전)이 있었던 자리다.

본래 미륵사는 3탑 3금당의

3원 1가람 양식의 사찰이었다.

 

석등 하대석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같은 연꽃무늬이다.

가장 오래된 백제 석등이다.

 

서탑과 동탑의 모습

 

미륵사지는 서동으로 불린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로맨틱한 스토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연못에 미륵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왕비의 청으로 이 곳에 절을 지었는데 바로 미륵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이런 주장을 일방적으로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복원을 위해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미륵사를 누가 세웠느냐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선화공주를 역사적 인물이 아닌 설화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했다. 반면 선화공주는 실제 인물이며 무왕의 여러 왕비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뭏든 추가적인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이다. 자, 다시 석탑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일제는 허물어져가는 서탑에 시멘트를 발라 임시방편으로 탑의 형태를 유지시켰다. 그 흉측한 몰골을 해체하고 고증을 통해 다시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재현한 것이 지금의 서탑이다. 이십여년간 진행된 복구작업의 결과다. 단순히 복원하는데 걸리는 시간만 길었던 것이 아니다. 많은 자금, 과학적 진단과 분석,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 분야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가 판단할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이 복원사업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는 대단하다. 가장 모범적인 문화재 복원의 예라는 찬사도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것은 복원과정에 안이한 상상력이 끼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추론까지도 단호히 배격했다. 그래서 층수를 서탑에 맞추어 9층으로 하지도 않았고, 복원 당시 눈에 보였던 부분까지만, 그러나 매우 성실하고 세심하게 복원하였다. 이 점이 좋다.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과학, 우리 문화재를 지키다>라는 특별전에서 보았던 문구가 생각나서 다시 그대로 옮겨본다. -해당 문화재가 후대에는 지금과 다른 방법과 보존 원칙에 따라서 보존, 관리,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자신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행위가 후대에 부정적인 옇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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