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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제주도 우도

<제주도 가볼만한 곳> 서귀포 : 추사 김정희 유배지

by *Blue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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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여행> 추사 유배지 : 김정희에 대한 단상

 

제주도를 그렇게 많이 다녀왔지만 부끄럽게도 추사 김정희 유배지는 이번에 처음 가봤다. 수년 전 예산에 있는 추사 고택 답사를 다녀온 이후 추사 관련 답사로는 처음인 셈이다. 물론 서울 봉은사의 현판 '판전'과 해남 대흥사에 있는 '무량수각' 현판 글씨를 통해 중간중간 그를 만나볼 수는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일반에 전시했던 <세한도>를 실견한 감동은 아직도 여전하다. 흔히들 세한도의 탄생은 제주도 유배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주도는 추사체,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의 예술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성숙되고 완성되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 추사 연구가들의 평이다. 과연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내가 잘 모른다는 의미다. 추사의 유배지를 찾아 떠나는 내 마음도 그저 단순한 기대감보다는 진지한 혼란스러움 같은 것이었다.  

유배지 가는 길 /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척이다. 바로 옆에 추사 기념관인 추사관이 있다. 

 

유배지로 이어지는 길은 돌담과 잔디가 잘 정리되어 있다. 두그루 나무는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 잣나무를 상징하는 듯하다. 

 

김정희가 유배되어 살던 곳이다. 돌담 너머로 가시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위리안치인 셈이다.

 

대문 & 쉐막 (외양간) / 일반적으로 제주도에는 대문이 없다. 하지만 부잣집의 경우에는 이처럼 대문을 달았다고 한다. 쉐막은 소를 기르는 외양간으로 대문 옆에 두었다. 

 

 

안거리 (안채) /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제주 갑부인 강도순은 추사가 유배와서 가르친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추사는 강도순의 집 별채에 기거했다. 

 

물팡 / 물팡은 물허벅을 올려 놓던 곳이다. 물허벅이란 식수용 물을 길을 때 사용하던 용기를 말한다. 바닷가의 샘물이나 고인 빗물을 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모거리 / 추사가 거처했던 별채다.

 

담장을 둘러친 탱자나무는 유배온 죄인이 담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위리안치를 위한 것이다. 

 

돗통시 /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 놓은 공간이다. 돼지를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다시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비료로 사용하는 방법은 제주의 지혜로운 농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말방에 (horse-driven mill) / 연자방아를 뜻하는데 '말방에'의 '말'은 원래 '아래 아'자를 쓴다. 보리와 조가 주식인 제주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말방에가 있었는데, 이 집에는 개인 소유의 말방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부를 짐작할 수 있다. 

 

밖거리 / 바깥채를 말한다. 이 곳에서 추사는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추사의 문하에 삼천 선비가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추사는 제자를 많이 길러냈는데, 유배시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사 김정희와 추사체를 모르는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희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추사체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사람이 일반인 중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니 그런 어려운 문제는 접어두고, 추사체를 다른 예서나 전서체와 구별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 문화 교육의 수준이 이러하다). 우리는 추사체라는 단어는 알고 있지만, 정작 그 글자 모양이 어떤지는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추사와 그의 예술에 대해 모른다. 그저 줏어들은 이야기들의 단편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허술하고 흐릿한 이미지로만 이해할 뿐이다. 김정희라는 인물은 단순히 서예가라는 틀에 가둬 두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크다. 그는 본래 금석학의 대가다. 서예는 추사체뿐 아니라 특히 예서에 매우 능했다. 세한도로 대표되는 소위 문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불이선란도> 속의 난초는 파격을 넘어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이 느껴진다. 불교에 대단한 조예가 깊었음도 빼놓을 수 없다. 문자향 서권기를 설파할 때는 무슨 계몽 운동가 같기도 하다, ㅋㅋ. 하지만 나는 그가 참 좋은 인격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청나라 지식인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는 것도 어찌 보면 그가 청의 문화적 영향권을 벗어나려는 자각 혹은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교만, 계급의식, 무례함... 몇몇 문헌이나 일화를 보면 그에게서는 재승박덕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런저런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제주도 서귀포의 유배지를 다녀왔다. 8년이 넘는 인고의 유배 생활이 추사를 단련시켜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유배지를 가본 것만으로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애당초 무리다. 정성스럽게 복원되고 조성되었을 유배지에서 추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기거했다는 거기서 그 시간 그를 잠깐 생각했다. 그와의 사이에는 몰이해(沒理解)의 강이 너무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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