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 압구정 로데오역> 고기준 : 샤토 브리앙 / 육회
상호가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고기준>이라는 이름에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고기'라는 말이 들어가는 걸 보니 고깃집이라는 상징성을 위한 것으로는 보인다. '준'은 사람 이름일까. '주다'의 완료형일 수도 있고.. 이미지나 의미의 영역을 뛰어넘는 추상화처럼, 혹은 그저 음성학적 치장이나 강조를 위해 마련한 허사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기억하기 쉽거나 예쁜 이름은 아니다). '고기'에 중의적인 다른 깊은 뜻이 있을 수도 있고, 기준이 높아서 '고기준'일 수도..ㅋㅋ. 아무튼 나의 빈곤한 상상력은 여기까지다. 아, 어쨌든 나는 사설이 길다. 나도 안다. 이제 밥 먹은 얘기 좀 하자, 제발.., ㅋㅋ.
고기준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고 포스팅은 처음이다. 요즘은 한식과 양식의 구분이 점점 애매해지고, 그런 면에서 <고기준>도 분류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 이 집은 '강남 청담동에 있는 고급 고깃집'이라고 정리하자. 청담동이지만 다소 한적한 골목길에 숨은 듯 있다. 오랜만에 친구들 넷이 모여 여기서 고기 먹고 술 마셨다. 옛 친구들과 함께라면, 가령 프라이팬에 스팸을 구워 먹어도 너무 맛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곳에서 샤또 브리앙을 먹는다면 그것도 썩 괜찮은 그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대체 샤토 브리앙은 또 뭐냐...?
고기준 / 요란스럽지 않은 모습이 편안하다.
예약되었던 룸의 모습 / 밝은 데 뭐랄까 안정감이 있지는 않다. 그림 때문일까. 조명이나 인테리어의 색감, 테이블과 그림의 배치나 조화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가 보다. 아님 그냥 컬러나 톤을 깔마춤 하면 그게 조화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은 홀 쪽도 비슷하다.
미리 세팅되어 있던 테이블에는 홀그레인 머스타드, 와사비등 소스류가 준비되어 있다. 와사비에는 시소 잎이 들어있는데, 누구의 생각인지 아주 좋은 조합이다. 소금도 있는데, 특별히 안데스 호수염이라고 한다. 이국적이고 고급이라는 걸 강조하는 듯한데 별 감흥은 없다. 우리나라 남도 지방의 천일염이 최고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장아찌 등 절임류와 부추무침... 매우 훌륭하다. 다만 접시, 종지 같은 식기는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 청자의 연리문처럼 흑백이 어우러진 육중한 테이블은 근사하지만 차가운 느낌에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샐러드 /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요즘 특히 야채에 손이 간다. 신선하다.
이건 더 맛있다. 외국 친구들에겐 한국식 배추 샐러드라고 소개하고 싶다. 내공이 느껴지는 손맛이다. 최고다.
오늘의 주인공이자 고기준의 시그니쳐인 샤토 브리앙 등장...! 그냥 쉽게 얘기하면 안심이다.
이날 나온 메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육회... 아름답다.
고기준의 육회는 해체한 후에도 포스가 살아있다. 미나리는 색감은 말할 것도 없고 식감과 풍미가 일품이다. 육회는 일반적인 우둔살보다는 기름기가 다소 많았으나 야채와의 조화 측면에서는 오히려 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외한인 나의 개인적 취향에 근거한 촌평이다.
다시 샤토 브리앙... 화력 좋은 최상급 숯불에 직원분이 익숙하고 잰 손놀림으로 고기를 구워준다.
야채,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고기와 함께 먹었다. 특히 달달한 알배추는 씹을 때마다 즙이 풍성하게 나오는데 영화로 치면 그야말로 신 스틸러다.
이건 아마도 채끝 등심으로 생각된다. 이름도 근사한 샤토 브리앙 안심은 바로바로 집어먹느라고 다 구워 접시에 올린 사진은 못 찍었다.
불판에 함께 익혀주는 장조림. 생고기를 간장 양념과 함께 졸여서 만드는데 별미다. 재미도 있고 특별한 느낌도 난다.
명란탕 / 깔끔한 맛이다. 배는 많이 불렀지만 마무리 식사로 좋았다. 명란은 원래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에 의해 개량 변화되어서 지금의 달달하고 소프트한 맛으로 정착했다 (명란을 일본 고유의 음식으로 알고 있는 한국인들도 많다). 현재 우리의 전통 명란젓은 완전한 복원이 안된 상태고 일본의 가미 명란이 마치 원조인양 대접받고 있는 현실이 아쉽다. 뭐 그건 그렇고, 명란탕에 들어간 미나리는 색감, 식감 모두 훌륭하다. 명란도 고급의 백명란을 사용하였다.
친구들 만나기 전에 호림 박물관 신사관에서 <공명>이라는 멋진 전시를 관람했다. 부푼 마음에 오랜만에 DSLR까지 챙겨갔다. 개인에게서 대여한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시물의 촬영을 허용한 호림 박물관측의 배려에 감사한다. 작품들은 먼저 마음속에 담았다. 이후에 다시 카메라에 저장했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잡은 손맛이 좋았다. 카메라 챙겨간 김에 고기준에서도 멋진 메뉴들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이 아닌 DSLR로 촬영하기는 참 오랜만이다. 하지만 사실 친구들 만나 반갑게 떠들고 마시는 통에 구도나 촛점은 엉망이다, ㅋ. 이제 음식 얘기해보자. 이 집의 밑반찬과 야채는 훌륭하다. '반찬'이 가지고 있는 조연이라는 숙명을 막 거부하려고 할 만큼 맛있다는 얘기다. 다음은 양념과 향신료... 시소향 은은한 와사비는 새로운 발견이었지만, 안데스 어쩌고 하는 소금은 허세만 느껴지고 별로였다. 미네랄 듬뿍 든 깊은 맛의 굵은 국산 천일염으로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다. 우리 땅에서 나는 고기에는 우리 소금이 맞다고 믿는다. 샤토 브리앙도 그렇다. 나는 원래 미식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샤토 브리앙'이 갖는 부드러운 어감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소위 양고기 전문점에서 흔히 듣는 '프렌치 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냥 '최상급의 안심'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고 하는 것이 프랑스 말 '샤토...'보다 더 진정성 있게 가슴을 친다. 하지만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듯, 고기준의 메뉴 이름이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져야 할 이유는 일도 없다. 그냥 내 개인 블로그니까 내 생각을 써보는 것뿐이다. 아무튼 샤토 브리앙과 이어 나온 등심 모두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아직 언급할 메뉴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육회다. 내가 본 육회 중에 가장 아름답다. 눈으로 먼저 먹는다는 일본 요리에 꿇릴 것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비주얼을 선보인다. 붉은 육회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상단부 위로는 근사한 가니쉬 (잣과 미나리 잎으로 기억함)를 올렸다. 하부는 강렬한 녹색의 미나리로 단을 쌓았다. 조형적으로, 컬러의 대비 측면에서도, 그리고 질감으로도 아름답다. 이우환의 작품 분위기와 유사하다고 내 맘대로 느꼈다. 색감의 아름다움과 강렬함은 유영국을 닮았다. 육회를 이런 모양과 컴비네이션으로 만들어 낼 생각은 누가 했을까. '센스'라는 가벼운 말보다는 '대단한 안목'이라고 평하고 싶다. 이 날 이 육회를 먹는 것만으로도 고기준을 방문할 이유는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 잠깐 언급했지만, 조명, 테이블과 의자, 그림 등이 이 집의 장점들을 가린다고 느꼈다. 의자 색과 그림의 색을 똑같이 맞추려고 일부러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누구 작품인지 모르겠으나 (그림만으로는 내가 모르는 작가다. 언뜻 보니 서명도 없는 듯하나 확인은 못했다) 고만고만한 반추상의 작품들은 식탁에 걸기에는 심심하다. 차라리 목가구나 도자기 등의 소품을 요란스럽지 않게 배치해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양철 테이블이 있는 대포집 벽에는 멋진 연예인이 소주잔 들고 있는 사진이 제격이듯, 일정 수준 이상의 맛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급 음식점에는 그에 걸맞는 그림이나 공예품이 필요하다. 유쾌하게 떠드는 선술집이라면 그저 맛만 있으면 되지만, 고기준 정도의 급이라면 인테리어 소품도 맛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그게 안데스 호수의 소금과 샤토 브리앙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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